제헌절에 한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
 
삼성재판 1심 결과의 파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건희 전 회장 등 피고인 전원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유죄 판결을 내린 조세포탈에 대해서도 실형이 아니라 집행유예를 선고했죠.
심지어 재판장이었던 민병훈 부장판사는 7월16일 선고 다음날 기자들에게 "1심 판결이 2심 재판부에 의해 뒤집힐 수도 있다"고 말했다는군요. 판사는 오직 판결문으로 말한다는데, 한 법조 출입기자 말마따나 법정 안에서 판결은 개판으로 해놓고 법정 밖에서 이를 뒤집는 발언을 하다니, 그 깊은 속을 도무지 헤어릴 길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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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재판장(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부장판사)께 이 글을 쓰는 날이 ‘공교롭게’ 제헌절이군요. 60번째로 헌법의 제정과 공포를 기념한 7월17일 총리·국회의장과 함께 경축 건배를 드는 법원 수장의 모습이 올해는 유난히 눈길을 끕니다. 대체로 저 같은 일반 국민은 제헌절을 그저 공휴일의 하나로, 올해부터는  ‘빨간’ 날이 아니라 ‘검은’ 날이 되었지만, 무감하게 지나쳤을 겁니다. 비교적 준법하며 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올해 제헌절은 저에게 ‘유감’하고 민감하게 다가옵니다. ‘법’이라는 묵직한 것이 머리를 짓누르면서 심사가 좀 뒤틀리기도 합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니 어제 민병훈 부장판사께서 낭랑한 목소리로 읽은 판결문 탓 같습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 건은 무죄이고, 삼성SDS 신부인수권부사채(BW) 건은 공소시효가 지나 면소한다는 판결을 내리셨지요. 피고인 8명 가운데 4명은 무죄 혹은 면소이고, 이건희 전 회장 등 4명 피고인의 경우는 조세 포탈 혐의에 일부 유죄를 인정했지만 모조리 집행유예 처분을 내린 것은 저에게는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최종 판단은 재판부의 몫이고, 판결 내용이 어떠하든 법치주의를 깨뜨릴 발상이 아니라면 존중해야 한다지만, 판결 직후 거센 후폭풍이 일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납득할 수 없다’ 혹은 ‘국민의 법 감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유전무죄의 결과다’ 따위의 부정적 반응이 쏟아져 나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고 직후 민 부장판사께서는 “유전무죄 논란이 생길 수 있지 않겠나”라는 기자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지요.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법에 따라 결론을 내렸다.”

 저는 417호 대법정에 나가 ‘2008 고합 366 사건’ 공판을 지켜보았습니다. 저에게 민 부장판사께서는 매우 인상적인 재판장이었습니다. ‘특검이 해야 할 일을 재판부가 하고 있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열정적으로 재판에 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민 부장판사께서 직권 증인으로 부른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이 선고 직후 법원 기자실에서 “특검의 부실 수사와 재판부의 역사의식 결여가 빚어낸 참극이다”라고 혹평한 것을 들으셨습니까? 극도의 실망감을 표출한 겁니다.

저 역시 기대가 자못 컸습니다. 사석에서 한 말이라지만, 삼성 사건과 관련해 “죄를 저질러 받는 죗값이 죄를 통해 얻은 이익보다 커야 한다. 그것이 경제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다”라고 말한 이가 1심 재판장으로 결정되어 법원 안팎에서 피고인들에게 중형이 선고되리라는 관측이 나돌았습니다.
 
특별검사 측이 항소했으니 항소심이 열릴 것이고, 이변이 없는 한 3심까지 가겠지만, 저는 이번 선고가 상당히 나쁜 선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판결문에는 배임을 막아야 할 법원이 이를 부추기는 듯한 대목이 있습니다. “기존 주주들이 인수권을 부여받아 비서실 지시에 의해 실권한 경우라도 에버랜드 지배구조 변경이나 기존 주주의 손해를 스스로 용인해 에버랜드에 대한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비서실 지시에 따른 법인 주주의 실권을 사실상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용인했으므로 문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다분히 실질(제3자 배정)이 아니라 형식 논리(주주 배정)를 따른 것으로 한국 재벌 구조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듣자니 민 부장판사께서는 상법 전문가에다 경제 사안에 대해 조예가 깊은 판사라고 알려져 있던데, 그래서 저는 이번 판결이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재벌 전문가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이 총수의 전횡이 가능한 지배구조 아닙니까. 총수의 이해를 받드는 비서실 혹은 구조본 같은 콘트롤타워가 각 계열사의 이사회 같은 의사결정기구를 무력화하기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쉽다고 하는 곳이 재벌 체제입니다. 그런데도 이사회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는 등 그 형식도 결정적 흠결이 있습니다만, 이사회 개최라는 형식을 갖추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민 부장판사께서는 보신 겁니다. 이것은 한국 기업들에게 '형식만 대충 갖추면 배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만천하에 공개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된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 기소 건에 대해 1·2심 재판부가 “현저하게 불공정한 발행이다”라며 배임의 고의성을 인정한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대법원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이 사안은 거의 1년 동안 계류되어 있습니다. 법원의 기존 판단을 뒤집기로는 삼성SDS 건도 마찬가지군요. 이번 삼성 1심 재판부는 기존 법원의 판단, 상급심 판단까지도 모조리 배척했군요. 그 배짱이 참으로 두둑해 보입니다.

민 부장판사께서는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가격을 이전에 있었던 다른 재판에서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고 있으실 겁니다.  2004년 국세청과 이재용 전무 등이 벌인 세금 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은 “주당 5만3000~5만4000원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거래에 의해 형성된 객관적 교환가치다”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에 맞서 삼성 쪽이 한영회계법인에 의뢰해 항소심에 제출한 가격도 주당 1만5501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평가 금액을 삼성 측은 삼성특검팀에도 그대로 증거 자료로 냈습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 모든 가격을 물리치고 가격 산정을 새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격이 8885원입니다. 애초 이 사채 발행가 7750원보다는 높지만 문제가 되었을 때  당사자가 인정한 가격(손해액 268억원)보다도 낮습니다. 당사자는 가장 자신에게 유리한, 즉 낮은 가격을 제시하기 마련 아닙니까? 그런데도 재판부는 웬일인지 이 가격조차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과는 면소입니다.손해액이 50억원을 넘지 않아 특경가법상 적용을 피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니라 7년으로 줄었습니다. 만약 당사자가 인정한 평가 금액만이라도 채택했더라면 손해액이 238억원에 달해 공소시효 만료에 따른 면소 판결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민 부장판사께서는 법원 안팎에서 무죄 선고를 위해 재판부가 논리를 짜맞추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을 아십니까?

따지고 보면 재판부가 유일하게 인정한 조세 포탈 부분에서도 포탈 금액이 465억원이라면 실형이 마땅한데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예외적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한 중견 변호사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번 판결에서 기이하고 예외적인 내용이 많은 것은 모두 이건희 재판이기 때문 아니겠느냐.”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재판 결과에 전혀 공감할 수가 없습니다.

듣자니 기자들에게 삼성SDS 면소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질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지요? 그렇게 예상하면서, 한 법조 출입 기자 말마따나 '심하게 봐준' 판결을 내리신 건가요? 아니 그리고 판사는 법정 안에서 판결문으로 말해야지, 법정 밖에서 그것도 스스로의 판단을 뒤집는 발언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헤아릴 길이 없군요.

이번 선고 내용을 보면서 심하게 심사가 꼬이고 뒤틀렸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의 의도가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무참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재판부의 독창적이고 소신에 따른 것이지 삼성의 권능에 짓눌린, 이건희이기 때문에 봐준 것은 아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법치주의의 사망선고이자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시사IN 장영희 기자


 

Posted by 이코노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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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꼬라지
    2008.07.2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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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훈 재판장은 복종의 기쁨을 잘 아는 분이십니다.
    명령 또한 복종처럼 기쁨을 만들어 줍니다.
    무엇보다 복종이 습관처럼 되어 있을 경우엔 기쁨이
    배가됩니다. 특히 강한 톤을 가진 명령자 밑에 있는
    하인(公僕)은 서로에게 기쁨을 어떻게 촉진시킬 지
    잘 아는 법입니다.
  2. anne2
    2008.07.21 16:4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언제까지 검찰의 정권꼭두각시노릇을
    신물나게 봐야합니까?!
    재탕삼탕 보던 영화 보고 또 보고
    다음 장면이 저절로 연상될 정도로 식상하고
    무식한 검찰을 그저
    두고보고만은 없을 듯 합니다.
  3. 2008.07.22 16:4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역시 시사인 기자님 다우십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시사저널때 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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